덴마크의 알렉산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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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는 덴마크 공주였으며, 웨일스 공비와 영국의 왕비, 왕대비를 지냈다. 1844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1863년 웨일스 공 앨버트 에드워드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의 문란한 사생활 속에서도 자녀 양육에 힘썼으며, 1901년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서거 이후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하면서 영국 왕비가 되었다. 1910년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한 후에는 왕대비로서 자선 활동을 이어갔으며, 1925년 샌드링엄 저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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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알렉산드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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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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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영국 및 영국 자치령의 왕비 인도 황후 |
재위 기간 | 1901년 1월 22일 – 1910년 5월 6일 |
대관식 | 1902년 8월 9일 |
제관식 | 1903년 1월 1일, 임페리얼 더르바르 |
출생명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
출생일 | 1844년 12월 1일 |
출생 장소 | 덴마크, 코펜하겐 옐로우 궁전 |
사망일 | 1925년 11월 20일 |
사망 장소 | 영국, 노퍽 주, 샌드링엄 하우스 |
매장일 | 1925년 11월 28일 |
매장 장소 | 윈저 성, 성 조지 예배당 |
배우자 | 에드워드 7세 (1863년 3월 10일 결혼, 1910년 5월 6일 사별) |
자녀 | 클라렌스 공작 앨버트 빅터 조지 5세 루이즈 공주 빅토리아 공주 모드 왕비 웨일스의 알렉산더 존 왕자 |
전체 이름 | 알렉산드라 캐롤라인 마리 샬롯 루이즈 줄리아 |
가문 | 글뤽스부르크 가문 |
아버지 | 크리스티안 9세 |
어머니 | 헤센카셀의 루이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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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덴마크 공주 시절
알렉산드라 캐롤라인 마리 샬럿 루이제 줄리아 공주는 1844년 12월 1일 코펜하겐의 옐로우 궁전에서 태어났다.[28] 아버지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 크리스티안(훗날 크리스티안 9세)이었고, 어머니는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주였다.[1] 그녀는 "알릭스"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프레데리크, 빌헬름, 다그마르, 티라, 발데마르 등 다섯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성장했다.
아버지 가문은 덴마크 왕가인 올덴부르크가의 방계였으나, 가족은 왕족임에도 비교적 검소하게 생활했다. 1852년, 런던 회의를 통해 아버지 크리스티안 공이 프레데리크 7세의 왕위 계승자로 지정되면서[2] 가족의 지위가 높아졌고, 베른슈토르프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으며, 코펜하겐 궁정 생활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라는 베른슈토르프에서 성장하며 코펜하겐의 영국 목사에게 영어를 배웠고, 스웨덴의 여성 수영 개척자 낸시 에드버그에게 수영 강습을 받았다.[3]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에서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평생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고교회파의 의례를 따랐다. 이 시기 알렉산드라는 아름다운 공주로 성장하여 유럽 여러 왕가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 1. 유년기 (1844-1863)
알렉산드라 캐롤라인 마리 샬럿 루이제 줄리아 공주(Princess Alexandra Caroline Marie Charlotte Louise Julia영어)는 1844년 12월 1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있는 옐로우 궁전에서 태어났다.[28] 아버지는 당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이었던 크리스티안(후일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 어머니는 헤센카셀의 루이세였다.[1] 가족들은 그녀를 "알릭스"(Alix영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형제자매로는 프레데리크, 빌헬름(후일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다그마르(후일 러시아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 티라, 발데마르가 있었다. 특히 여동생 다그마르와는 나이가 가깝고 같은 방에서 자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아버지의 가문은 덴마크 왕가인 올덴부르크가의 방계로 크리스티안 3세 국왕의 후손이었으나,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비교적 검소하게 생활했다. 당시 아버지는 군 복무 수입으로 연간 약 800파운드(£)를 벌었고, 가족이 살던 옐로우 궁전은 은전(恩典) 재산으로 무료로 제공된 것이었다. 때때로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잠자리 전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1848년 크리스티안 8세가 사망하고 외아들 프레데리크 7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자녀가 없었고 불임으로 여겨져 덴마크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덴마크 국왕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을 겸했는데, 덴마크와 달리 홀슈타인 공국에서는 살리카 법에 따라 여성의 계승이 불가능했다. 주로 독일인이 거주하던 홀슈타인은 독립을 선언하고 프로이센의 지원을 요청하는 등 상황이 복잡해졌다. 1852년, 유럽 주요 열강들은 런던 회의를 열어 알렉산드라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공을 프레데리크 7세의 모든 영토에 대한 계승자로 지정했다. 이는 크리스티안 공의 장모, 매제 등 다른 계승권자들이 권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루어진 불안정한 합의였다.[2]
이에 따라 크리스티안 공은 덴마크 공 작위를 받았고, 가족은 새로운 공식 거처인 베른슈토르프 궁전으로 이사했다. 가족의 지위는 높아졌지만 수입은 거의 늘지 않았으며, 프레데리크 7세의 세 번째 부인인 루이제 라스무센(과거 애인 관계로 사생아가 있었음)과의 만남을 거부했기 때문에 코펜하겐 궁정 생활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라는 여동생 다그마르와 함께 추운 다락방 침실을 사용했고, 직접 옷을 만들었으며 자매들과 함께 식탁 시중을 들기도 했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가정교사를 둘 수 없어 초기 교육은 부모에게 직접 받았다. 영어는 코펜하겐의 영국인 목사에게 배웠으며, 스웨덴의 여성 수영 개척자 낸시 에드버그에게 다그마르와 함께 수영 강습을 받았다.[3]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에서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평생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고교회파의 의례를 따랐다.
알렉산드라는 다그마르와 함께 아름다운 공주로 알려졌고, 결혼 적령기가 되자 유럽 여러 왕실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이 무렵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앨버트 공은 장남이자 왕위 계승자인 웨일스 공 앨버트 에드워드의 신붓감을 찾고 있었다. 처음에 빅토리아 여왕 부부는 알렉산드라를 이상적인 며느릿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덴마크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로 프로이센과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프로이센의 왕세자빈이 바로 빅토리아 여왕 부부의 장녀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였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 왕실은 조지 1세 이래 독일계 영방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빅토리아 여왕 자신과 남편 앨버트 공 모두 독일계였으며 다른 자녀들도 독일 왕족과 결혼시킨 상태였다.
그러나 여왕은 아들 앨버트 에드워드의 행실을 바로잡기 위해 아름다운 아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알렉산드라의 외왕고모이자 여왕의 숙모인 케임브리지 공작부인의 지속적인 추천에 따라 결국 당시 16세였던 알렉산드라를 "유일한 선택"으로 받아들였다. 여왕 부부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빅토리아 여왕의 외삼촌)의 주선으로 벨기에 왕궁에서 알렉산드라를 만났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최종적으로 결혼을 결정했다. 약혼이 성사된 후, 알렉산드라는 1863년 초 결혼식을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코펜하겐을 떠날 때 가장 친했던 여동생 다그마르가 눈물을 흘리며 배웅했다.
2. 2. 영국 왕실과의 혼담


1861년 11월, 웨일스 공 앨버트 에드워드가 스무 살이 되자, 그의 부모인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은 아들의 신붓감을 찾기 시작했다. 여왕 부부는 이미 결혼한 장녀 프로이센 왕세자빈 빅토리아의 도움을 받아 적합한 후보를 물색했다.
당시 덴마크는 프로이센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놓고 대립하고 있었고, 영국 왕실의 친척 대부분이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덴마크 출신의 알렉산드라는 처음부터 이상적인 후보는 아니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가 프로이센의 왕세자빈이었기에, 덴마크 공주를 며느리로 맞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후보들이 거절되면서, 알렉산드라는 "선택 가능한 유일한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다.[4] 또한 미모로 유명했던 알렉산드라 공주를 만나보기로 결정했다.
1861년 9월 24일, 빅토리아 왕세자빈은 슈파이어에서 오빠 앨버트 에드워드에게 알렉산드라를 소개했다. 약 1년 후인 1862년 9월 9일, 앨버트 에드워드는 숙부인 레오폴드 1세 국왕의 라켄 왕궁에서 알렉산드라에게 청혼했다.[5]
몇 달 뒤, 알렉산드라는 덴마크에서 왕실 요트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호를 타고 영국으로 건너와 1863년 3월 7일 켄트주 그레이브젠드에 도착했다.[6] 아서 설리번은 그녀의 도착을 기념하는 음악을 작곡했고,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은 알렉산드라를 위한 송가를 썼다:
:''
:알렉산드라!
:색슨족과 노르만족과 덴마크인은 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당신을 환영하는 덴마크인입니다,
:알렉산드라!
:— 알프레드 테니슨의 ''알렉산드라에게 보내는 환영''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롱리의 주례로 1863년 3월 10일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결혼식 장소 선정은 비판을 받았다. 런던 외곽에서 열려 많은 대중이 보기 어려웠고, 장소가 협소하여 초대를 기대했던 일부 인사들이 실망했기 때문이다. 또한 앨버트 공의 애도 기간이었기 때문에 하객인 여성들은 회색, 라일락색, 연보라색 등 절제된 색상의 옷을 입어야 했다.
3. 웨일스 공비 시절 (1863-1901)
1863년 3월 10일, 웨일스 공 알베르트 에드워드와 결혼하여 웨일스 공비(Princess of Wales)가 된 알렉산드라는 남편과 함께 샌드링엄 하우스와 멀버러 하우스를 오가며 생활했다. 부부 사이에는 3남 3녀가 태어났으나, 남편의 외도로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11] 알렉산드라는 남편의 불륜 상대에게 경멸감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자신은 결혼 생활 내내 정절을 지켰다.
점차 심해지는 유전적인 이경화증으로 인한 난청은 그녀를 사교계에서 다소 멀어지게 했고[13], 자녀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웨일스 공비로서 다양한 공적, 자선 활동에 참여했으며,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을 대신하여 많은 행사에 참석했다.[15]
왕실 내에서는 복잡한 관계를 겪기도 했다. 시누이 루이즈 공주의 혼처로 자신의 오빠인 덴마크 왕세자 프리드리히를 제안했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한 러시아 황제의 딸이었던 시동생 알프레드 공의 아내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와는 공식 석상의 좌석 서열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반면, 러시아 황후가 된 여동생 마리아 표도로브나(다우마)와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매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 자매는 1894년 조카인 니콜라이 2세와 알릭스 폰 헤센다름슈타트 공녀(훗날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결혼을 반대했으나, 결국 결혼은 성사되었다.[20]
당대 유럽에서 손꼽히는 미녀로 알려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트"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으며,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 역시 알렉산드라의 미모에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알렉산드라는 해외 순방, 공무 수행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1892년 장남 클래런스 공작 앨버트 빅터의 요절과 같은 개인적인 시련을 겪기도 했다.[18][19]
3. 1. 결혼과 자녀
1861년 11월, 웨일스 공 알베르트 에드워드가 스무 살이 되자 그의 부모인 빅토리아 여왕과 알베르트 친왕은 아들을 위한 신부를 찾기 시작했다. 장녀인 프로이센 왕세자빈 빅토리아의 도움을 받아 적절한 후보를 물색했는데, 당시 덴마크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로 프로이센과 대립하고 있었고 영국 왕실 친척 대부분이 독일인이었기에 알렉산드라는 첫 번째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후보들을 검토한 끝에 그녀를 "선택 가능한 유일한 사람"으로 결정했다.[4]
1861년 9월 24일, 프로이센 왕세자빈 빅토리아는 슈파이어에서 오빠 알베르트 에드워드에게 알렉산드라를 소개했다. 약 1년 후인 1862년 9월 9일, 알베르트 에드워드는 넬리 클리프든과의 관계 및 아버지 알베르트 친왕의 사망 이후, 백부인 벨기에 레오폴드 1세 국왕의 집인 라켄 왕궁에서 알렉산드라에게 청혼했다.[5]
몇 달 뒤, 알렉산드라는 덴마크에서 왕실 요트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를 타고 영국으로 건너와 1863년 3월 7일 켄트주 그레이브젠드에 도착했다.[6] 아서 설리반 경은 그녀의 도착을 기념하는 음악을 작곡했고,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 경은 알렉산드라를 위한 송가를 썼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롱리가 1863년 3월 10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주례했다. 결혼식 장소 선정은 비판을 받았는데, 런던 외곽에서 열려 많은 대중이 보기 어렵다는 언론의 불만이 있었고, 장소가 협소하여 초대를 기대했던 일부 인사들이 실망하기도 했다. 또한 알렉산드라의 가까운 친척만 초대되어 덴마크 측에서도 실망감을 표했다. 당시 영국 왕실은 알베르트 친왕의 서거로 애도 기간이었기에 여성 하객들은 회색, 라일락색, 연보라색 등 절제된 색상의 옷을 입어야 했다. 부부가 와이트 섬의 오스본 하우스로 신혼여행을 떠날 때, 인근 이튼 칼리지의 학생들(랜돌프 처칠 경 포함)이 환호하며 배웅했다.
결혼 초기, 호색가였던 에드워드 7세는 아름다운 아내에게 잠시 깊은 사랑을 보였으나 이내 관계가 소원해졌다. 패션 감각이 뛰어나고 지적이며 사교적인 에드워드 7세와 달리, 알렉산드라는 비교적 단순한 성격으로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선호했다. 또한 20대부터 청력을 점차 잃기 시작하면서 사교계 활동이 어려워졌고 남편과의 소통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러한 성격 및 신체적 요인은 재치 있는 여성을 선호했던 남편과의 관계 악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에드워드 7세의 무관심과 끊임없는 외도 역시 불화를 심화시켰다. 막내아들 존 왕자가 태어날 무렵에는 결혼 생활이 거의 파탄 상태였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라는 3남 3녀를 낳아 후계자를 생산하는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남편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사교계에서도 겉돌게 되면서 알렉산드라는 자녀들에게 크게 의지했다. 그녀의 첫 아이인 알베르트 빅터는 1864년 초 예정일보다 두 달 일찍 태어났다. 알렉산드라는 자녀들에게 매우 헌신적이어서 "보육원으로 달려가 플란넬 앞치마를 입고 아이들을 직접 씻기고 작은 침대에서 아이들이 잠든 것을 볼 때 영광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8] 알베르트 에드워드와 알렉산드라 사이에는 알베르트 빅터, 조지, 루이즈, 빅토리아, 모드, 알렉산더 존 등 총 여섯 자녀가 있었다. 모든 자녀가 조산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기 작가 리처드 휴는 알렉산드라가 빅토리아 여왕이 출산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아 의도적으로 출산 예정일을 잘못 알렸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1867년 세 번째 아이를 출산할 당시 류머티즘 발작 합병증으로 생명이 위독했으며, 이로 인해 평생 다리를 저는 후유증을 겪게 되었다.[9]
알렉산드라의 자녀들에 대한 과잉보호는 자녀들의 버릇없는 행동과 무지로 이어져 빅토리아 여왕마저 우려를 표할 정도였으나, 알렉산드라가 훈육 방식을 바꾸었다는 증거는 없다. 특히 딸들에게 깊이 의존했던 그녀는 두 딸 루이제와 모드가 뒤늦게 결혼하자 매우 화를 내며 슬퍼했다고 한다. 결국 상대적으로 순종적이었던 딸 빅토리아만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 어머니 곁을 지켰다. 빅토리아는 딸의 건강을 고려하여 알렉산드라가 결혼을 만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알렉산드라는 자녀들의 결혼 문제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나 남편 에드워드 7세가 권하는 혼담에도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파혼에 이르기도 했다. 장남 알버트 빅터의 배우자 후보로 헤센 대공녀 알렉산드라(후일 러시아 황후)가 거론되었으나 알렉산드라의 단호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차남 조지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녀 마리(후일 루마니아 왕비)가 연애 끝에 결혼하려 했을 때도, 빅토리아 여왕과 다른 왕실 인사들이 찬성했음에도 알렉산드라의 반대로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에드워드 7세의 그늘에 가려지기 쉬웠던 알렉산드라 역시 왕실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다정한 시어머니는 아니었던 알렉산드라는 유일한 며느리였던 테크의 메리에게는 매우 엄격하게 대했다.
결혼 이듬해인 1864년, 알렉산드라의 아버지가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하고 오빠 윌리엄이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1세가 되었으며, 여동생 다그마르는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와 약혼했다. 아버지의 즉위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운명에 대한 갈등을 심화시켰다. 독일 연방은 덴마크를 침공하여 영토의 5분의 2를 빼앗았다. 이 전쟁에서 알렉산드라와 알베르트 에드워드는 빅토리아 여왕과 프로이센 왕세자빈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덴마크를 지지했다. 프로이센에 의한 옛 덴마크 영토 점령은 알렉산드라의 독일인에 대한 깊은 반감을 키웠고, 이는 평생 지속되었다.[7]
공개 석상에서 알렉산드라는 위엄 있고 매력적이었으나, 사적으로는 다정하고 쾌활한 성격이었다.[10] 그녀는 춤과 스케이팅 등 사교 활동을 즐겼으며, 숙련된 승마 선수이자 탠덤 운전자이기도 했다. 또한 사냥을 즐겼는데, 이는 빅토리아 여왕의 반감을 샀고 여왕이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첫 아이 출산 후에도 활발한 사교 활동을 이어가면서 여왕과의 마찰이 생기기도 했으며, 이는 알렉산드라의 반(反)프로이센 감정과 여왕의 친(親)프로이센 성향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7]
3. 2. 엇갈리는 시어머니와의 관계
알렉산드라는 며느리로서 시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과 항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자녀 양육 방식과 혼사 문제에서 의견 차이를 보였다. 알렉산드라의 자녀들에 대한 지나친 과잉보호와 그로 인한 아이들의 버릇없는 행동 및 무지는 빅토리아 여왕을 놀라게 할 정도였으나, 알렉산드라가 시어머니의 우려를 받아들여 양육 방식을 바꿨다는 기록은 없다.또한 알렉산드라는 자녀들의 결혼 문제에 있어 빅토리아 여왕이나 남편 에드워드 7세가 제안하는 혼담에 반대하는 경우가 잦았으며, 이로 인해 혼사가 무산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장남 알버트 빅터의 배우자 후보로 헤센 대공녀 알렉산드라(훗날 러시아의 황후)가 거론되었을 때 알렉산드라가 강하게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차남 조지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녀 마리(훗날 루마니아의 왕비)와 결혼하려 했을 때도 빅토리아 여왕과 다른 왕실 사람들이 찬성했음에도 알렉산드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는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의 영향력 아래에서도 알렉산드라가 왕실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차녀 빅토리아가 평생 결혼하지 않은 것도 알렉산드라가 딸의 건강을 염려하여 결혼을 만류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알렉산드라 자신도 다정한 시어머니는 아니었다. 그녀는 유일한 며느리였던 테크의 메리에게 매우 엄격하게 대했다.
3. 3. 활발한 대외 활동
남편 웨일스 공 앨버트 에드워드와 함께 1868년 4월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이때는 전년도에 앓았던 병에서 회복하여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네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1868년부터 1869년까지는 6개월에 걸쳐 오스트리아, 이집트, 그리스를 순방했다. 이 방문에는 오빠인 그리스의 조지 1세 방문, 크림 전쟁 전장 시찰, 이스마일 파샤의 하렘 방문(여성으로서는 이례적인 방문이었다) 등이 포함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술탄 압둘 아지즈와 만찬을 함께 한 최초의 여성이 되는 기록을 남겼다.1877년 봄에는 건강 회복을 위해 그리스에 머물며 오빠 조지 1세 국왕을 만났다.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에는 여동생 마리아 표도로브나가 러시아 황태자비였기 때문에 러시아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며 오스만 제국에 반대했고, 그리스에 유리하도록 국경 조정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1881년에는 알렉산드르 2세 황제가 암살된 후 영국 대표 자격으로 남편과 함께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이는 황후가 된 여동생 마리아 표도로브나를 위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14]

알렉산드라는 수많은 공적 임무를 수행했다. 시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알렉산드라가 "나를 위해 행사의 긴장과 피로를 덜어주었다. 그녀는 바자회를 열고, 콘서트에 참석하고, 병원을 방문하는 등 내 자리를 대신했다... 그녀는 결코 불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루한 의무일 것을 즐겼다고 증명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했다.[15] 특히 런던 병원에 깊은 관심을 보여 정기적으로 방문했으며, '엘리펀트 맨'으로 알려진 조지프 메릭을 만난 적도 있다.[16]
대중은 대체로 알렉산드라를 열렬히 환영했지만, 1885년 아일랜드 방문 중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이 강했던 코크에서는 이례적으로 적대적인 반응에 직면하기도 했다. 당시 약 2,000~3,000명의 군중이 막대기와 검은 깃발을 흔들며 야유를 보냈으나, 알렉산드라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영국 언론은 이 사건을 보도하며 군중을 '열광적'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7] 같은 아일랜드 방문 기간 중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명예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4년, 처남인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하자 남편과 함께 러시아를 방문하여 장례식에 참석하고, 미망인이 된 여동생 곁을 지켰다. 이후 조카 니콜라이 2세와 알릭스의 결혼식에도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에 더 머물렀다.
3. 4. 개인적인 시련

호색가로 알려진 남편 에드워드 7세는 결혼 초기 알렉산드라에게 잠시 깊은 애정을 보였으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소원해졌다. 에드워드 7세는 패션 감각이 뛰어나고 지적이며 사교 활동을 즐겼던 반면, 알렉산드라는 비교적 단순한 성격에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과의 시간을 더 선호했다. 더욱이 알렉산드라는 20대부터 유전적인 이경화증으로 인해 청력을 점차 잃기 시작하면서[13] 사교계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남편과의 원활한 소통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성격 및 신체적 차이는 재치 있는 여성을 선호했던 남편과의 관계 악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에드워드 7세의 무관심과 끊임없는 외도 역시 부부 불화의 주요 원인이었다. 막내아들 존 왕자가 태어날 무렵에는 결혼 생활이 거의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라는 3남 3녀를 낳아 왕위 계승자를 생산하는 의무를 다했다.
남편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사교계에서도 점차 고립되면서 알렉산드라는 자녀들에게 크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녀들에 대한 지나친 과잉보호는 빅토리아 여왕마저 우려를 표할 정도였으나, 알렉산드라가 이러한 지적을 받아들여 양육 방식을 바꾸었다는 증거는 없다. 특히 딸들에게 깊이 의존했던 알렉산드라는 두 딸 루이제와 모드가 뒤늦게 결혼을 결정하자 크게 슬퍼하며 화를 냈다고 전해진다. 결국 딸 빅토리아만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 어머니 곁을 지켰다. 반면, 유일한 며느리였던 테크의 메리에게는 매우 엄격한 시어머니였다.
1871년, 알렉산드라는 여섯 번째 아이를 출산했으나 아기는 다음 날 사망했다. 그녀는 사생활 보호를 원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공식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일부 언론은 이를 "비참한 유산", 장례 준비를 "역겨운 허례허식"이라며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갓난아기는 왕실 묘지가 아닌 샌드링엄 교회 묘지에 조용히 묻혔다. 같은 해 말, 남편 에드워드 7세가 장티푸스로 심하게 앓게 되면서 부부 관계가 잠시 회복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1] 하지만 이후 알렉산드라가 류머티즘 열로 중병을 앓았을 때 에드워드 7세가 보인 무관심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결혼 생활 내내 에드워드 7세는 배우 릴리 랭트리, 워릭 백작 부인 데이지 그레빌, 인도주의자 애그니스 카이저, 사교계 명사 앨리스 케펠 등 여러 여성과 공공연히 교제를 이어갔다. 알렉산드라는 이러한 관계 대부분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남편이 임종을 맞을 때 앨리스 케펠이 병문안 오는 것을 허락하기도 했다.[12] 반면, 알렉산드라 자신은 결혼 생활 동안 정절을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75년부터 1876년까지 8개월간 에드워드 7세는 인도 순방을 떠났지만, 알렉산드라는 남편이 남성들로만 구성된 사냥 중심의 여행을 계획했기 때문에 동행하지 못하고 영국에 남겨져 실망감을 느꼈다. 이 순방 기간 중 발생한 에일즈퍼드 스캔들은 알렉산드라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었다. 남편의 친구인 에일즈퍼드 경의 부인이 블랜드퍼드 경과 불륜 관계를 맺고 이혼을 요구하자, 블랜드퍼드 경의 동생인 랜돌프 처칠 경과 에일즈퍼드 부인이 알렉산드라를 찾아왔다. 그들은 만약 이혼 소송이 진행되면 왕세자(에드워드 7세)를 증인으로 소환하여 스캔들에 연루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이 위협에 알렉산드라는 큰 정신적 고통을 겪었으며, 빅토리아 여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으로 왕세자는 랜돌프 처칠 경에게 격분하여 수년간 관계를 단절했다.
1885년 아일랜드 방문 중에는 코크 시(당시 아일랜드 민족주의의 온상)에서 아일랜드 민족주의 성향의 군중으로부터 야유를 받는 등 드물게 대중의 적대감을 경험하기도 했다. 약 2,000~3,000명의 군중이 막대기와 검은 깃발을 흔들며 부부를 비난했지만, 알렉산드라는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17]
개인적인 삶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1892년 장남인 클래런스 공작 앨버트 빅터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이 일로 깊은 슬픔에 잠긴 알렉산드라는 "나는 나의 천사를 묻었고, 그와 함께 나의 행복도 묻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9] 그녀는 아들의 방과 소지품을 아들이 사망했을 당시 그대로 보존하며 슬픔을 달랬다.[18]
4. 영국 왕비 시절 (1901-1910)
1901년 시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고 남편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하면서 알렉산드라는 왕비 겸 황후가 되었다. 왕비가 된 후에도 그녀의 역할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곁을 지킨 침전시녀 샬롯 놀리스 등 많은 측근들을 그대로 두었다. 아들 조지와 며느리 메리 테크가 두 차례(1901년, 1905-1906년) 제국 순방을 떠났을 때는 어린 손주들을 돌보았다. 1902년에는 남편 에드워드 7세의 급병으로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의 대관식이 연기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1906년 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가 서거하자, 이듬해인 1907년 알렉산드라는 여동생인 러시아의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와 함께 덴마크 코펜하겐 북쪽에 있는 별장 흐비도레를 개인 휴양지로 구입하여 덴마크 및 가족과의 유대를 이어갔다.[21]
알렉산드라는 외교 문제에서는 공식적으로 배제되어 국왕의 보고서를 보거나 외국 순방에 동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독일, 특히 조카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의 팽창이나 이익에 관련된 사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1890년 헬리골란트-잔지바르 조약 당시 헬리골란트 섬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환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지는 알렉산드라와 그녀의 여동생을 "국제적인 반독일 음모의 중심"이라고 비난했다.[22] 알렉산드라는 1900년에 빌헬름 2세를 "내적으로 우리의 적"이라고 부를 정도로 혐오하고 불신했다.
1910년, 알렉산드라는 토론 중인 영국 하원을 방문하여 여성 관람석에서 의회법 1911 논의를 2시간 동안 지켜본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이 법안은 귀족원의 입법 거부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알렉산드라는 사적으로는 이 법안에 반대했다. 얼마 후 코르푸에 있는 오빠 조지 1세를 방문하던 중 에드워드 7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여 남편의 임종을 지켰다. 남편의 마지막 순간에는 직접 산소통으로 산소를 공급하기도 했다. 그녀는 당시 심경을 프레더릭 폰슨비에게 "마치 돌로 변한 것 같아요. 울 수도 없고, 모든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어요."라고 표현했다.[23]
남편 사후 버킹엄 궁전을 떠나 말버러 하우스로 이사했지만, 샌드링엄은 계속 소유했다.[24] 새 국왕이 된 아들 조지 5세가 의회법 1911 문제로 자유당 총리 H. H. 애스퀴스와 대립하게 되자,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와는 별개로 아들이 총리의 요구(상원이 법안을 계속 거부할 경우 자유당 동료 귀족을 임명하겠다는 약속)를 마지못해 수락하도록 지지했다.
4. 1. 즉위와 대관식

1901년 시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자 남편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하였고, 알렉산드라는 왕비 겸 황후가 되었다. 당시 50세가 넘었음에도 30대로 보일 정도의 미모를 유지했으며,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길고 다소 엄숙했던 분위기와 달리 그녀의 밝은 성격은 대중에게 호감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에드워드와 알렉산드라의 대관식 준비가 진행되었으나, 1902년 6월로 예정되었던 대관식을 며칠 앞두고 국왕 에드워드 7세가 급성 충수염으로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 이에 알렉산드라 왕비는 국왕을 대신하여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했으며, 국민들의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국왕 없이 로열 애스콧 경마대회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대관식은 연기되었고, 에드워드 7세는 런던 병원의 프레더릭 트리브스 경에게 수술을 받아 회복했다. 이후 1902년 8월, 알렉산드라와 에드워드 7세는 함께 대관식을 치렀다. 국왕은 캔터베리 대주교 프레더릭 템플에게, 왕비는 요크 대주교 윌리엄 달림플 맥래건에게 각각 대관식을 치렀다.
4. 2. 왕비로서의 역할
1901년 시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자 남편 에드워드 7세의 즉위와 함께 알렉산드라는 왕비 겸 황후가 되었다. 당시 50세가 넘었지만 여전히 30대로 보일 정도의 미모를 유지했다.[2] 빅토리아 여왕의 길고 엄격했던 통치 이후 알렉산드라의 밝은 성격은 대중에게 호감을 주었다.[2] 그러나 "결벽증 때문에 손에 키스하는 것을 싫어한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다.[2]
왕비가 된 지 두 달 후, 아들 조지와 며느리 메리가 제국 순방을 떠나면서 어린 손주들은 알렉산드라와 에드워드 7세가 돌보게 되었다. 1902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이 예정되었으나, 행사 며칠 전 국왕이 급성 충수염으로 심각하게 앓았다. 알렉산드라는 국왕을 대신하여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하고, 로열 애스콧 경마대회에도 홀로 참석하여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대관식은 연기되었고, 에드워드 7세는 런던 병원의 프레더릭 트리브스 경의 수술을 받아 감염된 충수를 제거했다. 회복 후, 8월에 알렉산드라와 에드워드는 함께 대관식을 치렀다. 국왕은 캔터베리 대주교 프레더릭 템플에게, 왕비는 요크 대주교 윌리엄 달림플 맥래건에게 각각 왕관을 받았다.
왕비로서의 역할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많은 측근들을 그대로 두었다. 그녀의 침전시녀였던 샬롯 놀리스(윌리엄 놀리스 경의 딸)는 오랫동안 충실히 알렉산드라를 보좌했다. 1903년 12월 10일, 놀리스는 침실에 연기가 가득한 것을 발견하고 알렉산드라를 깨워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이 일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비 아우구스타는 "샬롯이 진정으로 알렉산드라의 생명을 구했다"고 평가했다.
알렉산드라는 1905년 겨울부터 1906년까지 조지와 메리가 영국령 인도로 두 번째 순방을 떠났을 때 다시 손주들을 돌보았다. 1906년 1월에는 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가 서거했다. 가족 간의 유대와 덴마크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1907년 알렉산드라는 여동생인 러시아의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와 함께 코펜하겐 북쪽에 있는 별장 흐비도레를 개인 휴양지로 구입했다.[21]
알렉산드라는 외교 문제에서 배제되어 국왕의 보고서를 볼 수 없었고 외국 순방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녀는 독일인, 특히 조카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강하게 불신했으며, 독일의 팽창이나 이익에 관련된 어떤 일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예를 들어 1890년, 그녀는 영국의 북해 섬 헬골란트와 독일 식민지 잔지바르를 교환하려는 계획에 대해 영국의 고위 관료와 군 관계자들에게 경고하는 의견서를 작성했다. 그녀는 헬골란트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 섬이 독일의 공격 기지가 되거나 영국의 방어 거점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은 체결되었고, 독일은 섬을 요새화했다. 역사가 로버트 엔서는 알렉산드라의 예측대로 헬골란트가 "공격과 방어 모두를 위한 독일의 해상 지위의 핵심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지는 알렉산드라와 그녀의 여동생인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를 "국제적인 반독일 음모의 중심"이라고 비난했다.[22] 알렉산드라는 빌헬름 황제를 혐오하고 불신하며, 1900년에 그를 "내적으로 우리의 적"이라고 불렀다.
1910년 알렉산드라는 토론 중인 영국 하원을 방문한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전례 없는 일로, 그녀는 2시간 동안 여성 관람석에 앉아 의회법 1911(상원의 입법 거부권을 박탈하는 법안)이 논의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적으로 알렉산드라는 이 법안에 반대했다. 얼마 후 그녀는 코르푸에 있는 오빠 조지 1세를 방문하기 위해 떠났다. 그곳에서 그녀는 에드워드 국왕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렉산드라는 즉시 돌아와 남편이 사망하기 하루 전에 도착했다. 남편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직접 산소통에서 산소를 공급하여 호흡을 돕기도 했다. 그녀는 프레더릭 폰슨비에게 "마치 돌로 변한 것 같아요. 울 수도 없고, 모든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어요."라고 말했다.[23] 그해 말 그녀는 버킹엄 궁전에서 말버러 하우스로 이사했지만, 샌드링엄은 계속 소유했다.[24] 새 국왕인 알렉산드라의 아들 조지 5세는 곧 의회 법안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라는 상원이 법안을 계속해서 막을 경우 총선 후에 충분한 자유당 동료를 임명하라는 총리 H. H. 애스퀴스의 요청에 아들의 마지못한 동의를 지지했다.
에드워드 7세의 여성 편력은 왕이 된 후에도 계속되었고, 그의 곁에는 항상 애인이 있었다. 1910년 국왕이 위독해지자 알렉산드라는 가능한 모든 연락을 취해 국왕의 친구들을 불러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도록 했다.[2] 하지만 국왕이 가장 총애했던 앨리스 케펠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에드워드 7세가 직접 연락하여 마지막 작별 인사를 위해 케펠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라는 남편이 위독해지자 그녀를 침실에서 내쫓았다. 그녀는 평생 케펠을 신뢰하지 않았고 증오했다.[2] 앨리스 케펠은 왕세자 시절부터 에드워드의 애인이었으며, 때로는 왕비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공식 행사에 국왕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공개 석상에서는 조용히 행동하며 왕비에 대한 예의를 지켰지만, 국왕의 침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알렉산드라 앞에서 에드워드 7세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등 알렉산드라를 불편하게 만들었다.[2]
4. 3. 남편과의 관계
호색가였던 에드워드 7세는 신혼 초에는 아름다운 아내 알렉산드라에게 깊이 빠졌으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소원해졌다. 에드워드 7세는 패션에 민감하고 지적이며 사교적인 활동을 즐겼지만, 알렉산드라는 비교적 단순한 성격으로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과의 교류를 선호했다. 또한, 20대부터 청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사교계 활동이 어려워졌고 남편과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알렉산드라의 성향과 건강 문제는 재치 있는 여성을 선호했던 남편과의 관계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 에드워드 7세의 무관심과 끊임없는 외도 역시 부부 사이의 불화를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었다. 막내아들 존 왕자가 태어날 무렵에는 결혼 생활이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라는 3남 3녀를 낳아 왕위 계승자를 낳는 의무를 다했다.
남편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사교계에서도 겉돌게 되면서 알렉산드라는 자녀들에게 크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녀의 지나친 과잉보호는 자녀들의 버릇없는 행동과 무지로 이어져 빅토리아 여왕조차 우려를 표할 정도였으나, 알렉산드라가 이러한 지적을 받아들여 양육 방식을 바꾸었다는 기록은 없다. 특히 딸들에게 깊이 의존했던 알렉산드라는 두 딸 루이제와 모드가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을 결정하자 크게 화를 내며 슬퍼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상대적으로 순종적이었던 딸 빅토리아만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 어머니 곁을 지켰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며느리였던 테크의 메리에게는 매우 엄격한 시어머니였다.
1901년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자 남편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하면서 알렉산드라는 왕비가 되었다. 당시 50세가 넘었음에도 30대로 보일 정도의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빅토리아 여왕의 길고 엄격했던 시대 이후, 알렉산드라의 밝은 성격은 대중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러나 "결벽증 때문에 손에 키스하는 것을 싫어한다"거나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는 등의 비판적인 평가도 있었다.
왕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라의 업무는 거의 변하지 않았고, 그녀는 많은 측근들을 그대로 유지했다. 알렉산드라의 침전시녀인 샬롯 놀리스(Charlotte Knollys)는 수년 동안 충실히 알렉산드라를 섬겼다. 1903년 12월 10일, 놀리스는 침실에 연기가 가득한 것을 발견하고 알렉산드라를 깨워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라는 외교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왕의 보고서를 볼 수 없었고, 외국 순방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녀는 독일인, 특히 조카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매우 불신했고, 독일의 확장이나 이익에 유리한 어떤 일에도 반대했다. 예를 들어, 1890년 알렉산드라는 영국의 고위 장관과 군 관계자들에게 배포될 의견서를 작성하여 영국의 북해 섬인 헬리골란트와 독일 식민지 잔지바르의 교환 계획에 대해 경고하고, 헬리골란트의 전략적 중요성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은 진행되었다. 독일은 섬을 요새화했고, 이는 알렉산드라가 예측했던 대로 독일 해상 지위의 핵심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알렉산드라와 그녀의 여동생인 러시아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를 비난하며, 두 사람이 "국제적인 반독일 음모의 중심"이라고 말했다.[22] 알렉산드라는 빌헬름 황제를 혐오하고 불신하며, 1900년에 그를 "내적으로 우리의 적"이라고 불렀다.
에드워드 7세의 여성 편력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계속되었고, 평생 애인이 끊이지 않았다. 1910년 에드워드 7세가 위독해지자 알렉산드라는 가능한 모든 연락을 취해 남편의 친구들을 불러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남편이 가장 총애했던 애인 앨리스 케펠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에드워드 7세가 직접 연락하여 임종을 지키도록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라는 그가 위독해지자 케펠을 침실에서 내쫓았다. 알렉산드라는 평생 앨리스 케펠을 신뢰하지 않았고 증오했다고 알려져 있다. 앨리스 케펠은 왕세자 시절부터 에드워드 7세의 애인으로, 때로는 왕세자비인 알렉산드라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공식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공개 석상에서는 비교적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왕비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 했지만, 에드워드 7세가 자신의 침실 출입을 허용하자 알렉산드라를 무시하고 침실에 들어가 왕비 앞에서 에드워드 7세와 애정 행각을 벌이는 등 알렉산드라의 신경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1910년 알렉산드라는 토론 중인 영국 하원을 방문한 최초의 왕비였다. 전례 없는 일로, 그녀는 2시간 동안 여성 관람석에 앉아 귀족원의 입법 거부권을 박탈하는 의회법 1911이 논의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적으로 알렉산드라는 이 법안에 반대했다. 얼마 후 그녀는 코르푸에 있는 오빠 조지 1세를 방문하기 위해 떠났다. 그곳에서 그녀는 에드워드 국왕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렉산드라는 즉시 돌아와 남편이 사망하기 하루 전에 도착했다. 남편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직접 산소통에서 산소를 공급하여 호흡을 돕기도 했다. 그녀는 프레더릭 폰슨비에게 "마치 돌로 변한 것 같아요. 울 수도 없고, 모든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어요."라고 말했다.[23] 그해 말 그녀는 버킹엄 궁전에서 말버러 하우스로 이사했지만, 샌드링엄은 계속 소유했다.[24] 새 국왕인 알렉산드라의 아들 조지 5세는 곧 의회 법안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라는 상원이 법안을 계속해서 막을 경우 총선 후에 충분한 자유당 동료 귀족을 임명하라는 총리 H. H. 애스퀴스의 요청에 아들의 꺼림칙한 동의를 지지했다.
5. 왕대비 시절 (1910-1925)
에드워드 7세 서거 이후, 알렉산드라는 재위 중인 군주의 어머니로서 왕대비가 되었다. 1911년 아들 조지 5세와 며느리 메리의 대관식에는 관례에 따라 참석하지 않았으나, 알렉산드라 장미의 날과 같은 자선 활동을 통해 공적인 삶을 이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과 전쟁 중이던 독일 왕족들이 받은 가터 훈장 깃발을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에 동조하기도 했다.[25] 그녀는 독일 제국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냈으며, 특히 프로이센에 비판적이었으나 자신의 헤센 친척들까지 비난받는 것에는 불만을 표했다.[25] 1916년 9월에는 샌드링엄에서 비행선 공습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편 러시아 혁명으로 조카인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이 혁명 세력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알렉산드라의 여동생인 황태후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1919년 HMS 말버러에 의해 러시아에서 구출되어 영국으로 망명했고, 한동안 알렉산드라와 함께 지냈다.
5. 1. 에드워드 7세의 죽음과 새로운 시대
자신의 미모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알렉산드라는 나이가 들면서 외모가 변하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한 후에는 공식 석상에서조차 미망인임을 이유로 두껍고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는 일이 잦았다. 여동생이자 러시아 황후였던 다우마(러시아식 이름은 마리아 표도로브나)와 함께 외부와의 접촉을 거의 피하며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노년기에 알렉산드라는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아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웠고, 노인성 치매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느리인 테크의 메리가 간질을 앓던 14세의 막내아들 존 왕자를 잃고 슬픔에 잠기자, 48년 전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막내아들 존을 기억해내고 슬픔을 함께 나누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5. 2.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에드워드 7세의 서거 이후, 알렉산드라는 재위 중인 군주의 어머니로서 왕대비가 되었다. 1911년 아들 조지 5세와 며느리 메리의 대관식에는 이미 대관식을 치른 여왕이 다른 국왕이나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것이 관례가 아니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선 활동에 시간을 할애하며 공적인 삶을 계속 이어갔는데, 그중 하나는 알렉산드라 장미의 날 행사로, 장애인들이 만든 인공 장미를 여성 자원봉사자들이 병원을 돕기 위해 판매하는 행사였다.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최고 훈장인 가터 훈장을 받은 외국 왕족들의 깃발을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거는 관습은 비판을 받았다. 가터 훈장을 받은 독일 왕족들이 영국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는 "저 혐오스러운 독일 깃발들을 내려야 한다"는 요구에 동참했다.[25] 여론에 밀려 국왕은 깃발들을 내리게 했지만, 알렉산드라는 그가 "저 비열한 프로이센 깃발들"뿐만 아니라 그녀의 헤센 친척들의 깃발들도 내린 것에 실망했는데, 그녀의 생각에 그들은 "그 잔혹한 독일 황제의 명령을 받는 단순한 병사나 신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25] 1916년 9월 17일, 그녀는 샌드링엄에서 비행선 공습을 경험하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조카인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로마노프 왕조가 타도되자, 알렉산드라는 황제 일가의 안위를 걱정했다. 러시아에서 황족과 귀족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여동생인 황태후 마리아 표도로브나(다우마)를 비롯한 일부 황족과 귀족은 크림반도의 얄타에 유폐되었다. 알렉산드라는 여동생의 구출을 위해 노력했고, 아들 조지 5세는 전함 말버러를 보내 황태후 마리아와 그 가족들을 크림반도에서 흑해를 거쳐 구출했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혁명가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공식 문서가 도착했을 때, 알렉산드라는 조지 5세와 함께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크림반도에서 구출된 여동생 마리아 표도로브나와 재회했지만, 조지 5세가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영국 망명을 거부했었기에, 알렉산드라는 친아들과 손주들을 잃은 여동생에게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1919년 영국으로 와 한동안 알렉산드라와 함께 살았다.

5. 3. 말년과 죽음
미모에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알렉산드라는 나이가 들면서 외모가 변하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남편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한 후에는 공식 석상에서도 미망인이라는 이유로 두껍고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는 일이 잦았다. 말년에는 여동생이자 러시아 황후였던 다우마(마리아 표도로브나)와 함께 외부와의 접촉을 줄이며 조용히 보냈다. 노년기에는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아 의사소통이 어려웠고, 노인성 치매로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며느리인 테크의 메리가 간질을 앓던 14세 막내아들 존 왕자를 잃고 슬픔에 잠겼을 때, 알렉산드라는 48년 전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막내아들 존을 떠올리며 슬픔을 함께 나누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알렉산드라는 노년에도 젊은 외모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중 건강이 점차 나빠졌다.[26] 그녀는 정교한 베일을 쓰고 진한 화장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그녀의 얼굴이 "에나멜을 칠한 것 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해외 여행을 더 이상 하지 않았고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1920년에는 눈의 혈관이 터져 일시적으로 시력 일부를 잃기도 했다. 말년에는 기억력과 언어 능력도 점차 저하되었다.
1925년 11월 20일, 알렉산드라는 샌드링엄 저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가, 11월 28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남편 에드워드 7세 곁에 묻혔다.[28][29]
6. 유산 및 평가
알렉산드라 여왕은 영국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며,[32] 남편 에드워드 7세나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달리 언론의 비난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녀는 자선 활동에 적극적이었으며, 특히 보어 전쟁 중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라 여왕 육군 간호 군단의 전신인 간호 부대가 창설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과 온화한 이미지 덕분에 그녀는 오랫동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패션과 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목의 작은 흉터를 가리기 위해 착용한 초커 목걸이와 하이넥 스타일은[34] 오랫동안 유행했으며, 병으로 인해 다리를 절게 되자 일부 상류층 여성들이 "알렉산드라 절뚝거림"이라 불리는 그녀의 걸음걸이를 따라 하기도 했다.[35][36] 또한 1908년 런던 올림픽 당시 그녀의 요청으로 마라톤 코스가 조정되어 현재의 42.195km 거리가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알렉산드라 여왕을 기리기 위해 알프레드 길버트가 제작한 알렉산드라 여왕 기념비가 1932년 런던에 세워졌으며,[30] 캐나다 토론토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로열 알렉산드라 극장이 1907년에 건립되었다.[45] 그녀의 삶은 여러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꾸준히 재조명되고 있다.[37][38][39][40][41][42][43][44]
6. 1. 대중적 인기와 자선 활동

알렉산드라는 영국 대중에게 매우 인기가 많았으며,[32] 남편 에드워드나 시어머니 빅토리아와 달리 언론의 비난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녀는 자선 활동에 적극적이어서, 모금 활동을 통해 수단 전쟁 중 부상자 수송을 위한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의 강정을 구입하는 데 기여했고,[33] 부상자 후송을 위한 병원선 '웨일스 공주호'를 장비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보어 전쟁 중에는 왕실 명령에 따라 알렉산드라 여왕 궁정 군사 간호 부대(Queen Alexandra's Imperial Military Nursing Service)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알렉산드라 여왕 육군 간호 군단(Queen Alexandra's Royal Army Nursing Corps)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런던 병원에 관심이 많아 자주 방문했으며, 이때 "코끼리 사나이"로 알려진 조셉 메릭을 만나기도 했다.[62]
알프레드 길버트(Alfred Gilbert)가 제작한 알렉산드라 여왕 기념비는 1932년 6월 8일 런던 말버러 게이트에서 알렉산드라 장미의 날(Alexandra Rose Day)에 공개되었다.[30] 공개식에서는 당시 국왕 음악 감독이었던 에드워드 엘가 경이 계관 시인 존 메이스필드의 시에 곡을 붙인 추모곡 "So many true princesses who have gone"를 직접 지휘하여 연주했다.[31]
알렉산드라는 패션과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 수술로 생긴 목의 작은 흉터를 가리기 위해 초커 목걸이나 하이넥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었는데,[34] 이는 약 50년간 유행을 선도했다. 1867년 셋째 딸 루이즈를 낳은 후 류머티즘 열 합병증으로 다리를 절게 되자, 일부 상류층 여성들은 "알렉산드라 절뚝거림"이라 불리는 그녀의 걸음걸이를 따라 하기도 했다. 또한 다리가 불편하여 지팡이 대신 파라솔을 사용하면서 파라솔이 상류 사회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그녀는 주로 런던의 레드펀 같은 패션 하우스를 이용했지만, 파리의 자크 두세나 프로몽에서도 가끔 옷을 구입했다. 그녀가 좋아했던 꽃인 스위트피는 그녀 덕분에 여러 나라에서 인기를 얻었다. 칵테일의 한 종류인 알렉산더는 에드워드 7세가 알렉산드라에게 바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마라톤 거리가 42.195km가 된 것도 그녀의 영향인데, 1908년 런던 올림픽 당시 알렉산드라가 출발 지점을 윈저 성 정원으로, 결승 지점을 경기장 로열 박스 앞으로 지정하면서 기존의 약 42km(26마일)에서 385야드가 추가되어 현재의 공식 거리가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돈에 대한 관념이 부족하여 재정 관리는 충실한 감독관인 다이튼 프로빈 경(빅토리아 십자훈장 수훈자)이 맡았다. 그는 남편 에드워드 7세를 위해서도 같은 역할을 했다. 손자인 에드워드 8세(후일 윈저 공작)는 그녀가 돈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으면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수표를 보내줄 정도로 관대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낡은 스타킹을 기워 신고 낡은 드레스를 가구 커버로 재활용하는 등 항상 사치스럽지는 않았지만, 과도한 지출에 대한 지적은 무시하거나 듣지 못한 척했다.
그녀는 난청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또한 동물을 매우 좋아하여 샌드링엄 거처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선물로 보내졌고, 수가 너무 많아지면 동물원에 기증하기도 했다. 특히 애견가여서 야외에서는 세인트 버나드, 뉴펀들랜드, 북극견, 바셋하운드, 차우차우, 닥스훈트 등을 길렀고, 실내에서는 퍼그, 긴털치와와, 페키니즈를 길렀다. 산책 시에는 10마리가 넘는 개를 데리고 다녔으며, 개들은 그녀의 명령에 잘 따랐다고 한다. 켄넬 클럽의 후원자이기도 했으며, 그녀의 개들은 여러 품평회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밤에는 몰래 야식으로 나온 샌드위치를 침대에서 개들에게 먹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라는 여러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서 묘사되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에드워드 7세》(Edward the Seventh)의 데보라 그랜트와 헬렌 라이언, 《릴리》(Lillie)의 앤 파인뱅크, 《모든 국왕의 사람들》(All the King's Men)의 매기 스미스, 《잃어버린 왕자》(The Lost Prince)의 비비 안데르손이 그녀를 연기했다.[37][38][39][40] 영화에서는 1980년 《코끼리 사나이》(The Elephant Man)에서 다시 헬렌 라이언이, 1997년 《미세스 브라운》(Mrs Brown)에서 사라 스튜어트가, 1999년 《열정》(Passion)에서 줄리아 블레이크가 연기했다.[41][42][43] 1980년 로이스 라이턴의 희곡 《마더디어》(Motherdear)에서는 마가렛 록우드가 마지막 연기로 알렉산드라를 연기했다.[44] 또한,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북미 최초의 왕립 극장인 로열 알렉산드라 극장은 1907년 에드워드 7세가 특허장을 수여하며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45]
6. 2. 패션 아이콘
알렉산드라는 당대 패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 수술[34] 혹은 림프절결핵 수술로 인해 목에 생긴 흉터를 가리기 위해 초커 목걸이나 목을 높이 감싸는 하이넥 스타일을 선호했는데,[34] 이는 당시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며 약 50년 동안 유행을 이어갔다.[34]1867년, 셋째 딸 루이즈를 낳은 후 심각한 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35][36] 당시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는 알렉산드라의 이러한 걸음걸이를 모방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는 "알렉산드라 절뚝거림"(영어: Alexandra Limp)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35][36] 또한, 다리가 불편하여 지팡이 대신 파라솔을 짚고 다니기 시작하자, 이것이 상류 사회 여성들 사이에서 새로운 유행이 되기도 했다.
알렉산드라는 주로 런던의 패션 하우스를 이용했으며, 특히 레드펀을 선호했다. 때로는 파리의 유명 디자이너인 자크 두세나 프로몽(Fromont)의 의상을 구매하기도 했다.
6. 3. 문화적 영향
알프레드 길버트가 제작한 알렉산드라 여왕 기념비는 1932년 6월 8일 런던 말버러 게이트에서 알렉산드라 장미의 날(Alexandra Rose Day)에 공개되었다.[30] 당시 국왕 음악 감독(Master of the King's Musick)이었던 에드워드 엘가 경이 당대의 영국 계관 시인(Poet Laureate) 존 메이스필드의 시에 곡을 붙인 추모곡, "So many true princesses who have gone"가 공개식에서 작곡가의 지휘로 연주되었다.[31]
알렉산드라는 영국 대중에게 매우 인기가 많았다.[32] 남편이나 시어머니와 달리 언론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 그녀가 모금 활동을 통해 마련한 기금은 수단 전쟁 중 부상자 수송을 위한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의 강정을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고, 부상자들을 후송하기 위한 '웨일스 공주호'라는 이름의 병원선을 장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33] 보어 전쟁 중에는, 나중에 알렉산드라 여왕 육군 간호 군단으로 이름이 바뀐 알렉산드라 여왕 궁정 군사 간호 부대(Queen Alexandra's Imperial Military Nursing Service)가 왕실 명령에 따라 창설되었다.
알렉산드라는 어린 시절 수술로 인한 작은 목 흉터를 초커 목걸이와 하이넥으로 가렸는데,[34] 이는 50년 동안 유행을 선도했다. 1867년 세 번째 아이인 루이즈를 출산한 후 합병증으로 다리가 굳어 절뚝거리게 되자, 상류층 여성들은 그녀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까지 따라 했다. 이는 "알렉산드라 절뚝거림"으로 알려지게 되었다.[35][36] 지팡이 대신 파라솔을 사용하게 되자 파라솔을 사용하는 것이 상류 사회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그녀는 주로 런던의 패션 하우스를 이용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곳은 레드펀이었지만, 파리의 자크 두세와 프로몽에서도 가끔 쇼핑을 했다.
알렉산드라는 난청 장애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해져 고통을 겪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꽃은 스위트피였으며, 의식이나 만찬회에서 스위트피를 장식하여 여러 나라에서 스위트피가 유명해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 칵테일의 하나인 알렉산더는 에드워드 7세가 알렉산드라에게 바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마라톤의 거리가 42.195km가 된 것은 1908년 런던 올림픽 당시 알렉산드라가 출발 지점을 윈저 성 정원으로, 결승 지점을 경기장 관람석 앞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당초 윈저 성에서 셰퍼드 부시 경기장까지 약 42km(26마일)를 경로로 했지만, 알렉산드라의 지시에 따라 약 352.04m가 연장되었고, 이 거리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런던 병원에 관심이 많아 자주 방문했으며, 그녀가 만난 환자 중에는 "코끼리 인간"으로 알려진 조셉 메릭도 있다.[62] 또한 동물을 매우 좋아하여 그녀의 거처였던 샌드링엄 궁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선물로 보내졌고, 수가 너무 많아진 동물들은 동물원에 기증되었다. 애견가이기도 해서 야외에서는 세인트 버나드, 뉴펀들랜드, 북극견, 바셋하운드, 차우차우, 닥스훈트 등을, 실내에서는 퍼그, 긴털치와와, 페키니즈 등을 길렀으며, 산책 시에는 10마리 이상의 개를 데리고 다녔다. 그녀는 켄넬 클럽의 후원자였고, 그녀의 개들은 여러 번 품평회에 출품되어 수상했다.
알렉산드라는 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녀의 재정 관리는 충실한 감독관(Comptroller)인 빅토리아 십자 훈장(VC) 수훈자 다이튼 프로빈 경이 맡았는데, 그는 그녀의 남편을 위해서도 같은 역할을 했다. 손자인 에드워드 8세(후일 윈저 공작)에 따르면, "그녀의 관대함은 재정 고문들에게 당혹스러운 원천이었다. 그녀는 돈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으면, 구걸하는 사람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지 않고, 다음 우편으로 수표를 보냈다." 항상 사치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낡은 스타킹은 기워서 다시 사용했고, 낡은 드레스는 가구 커버로 재활용했다), 과도한 지출에 대한 항의는 손짓으로 무시하거나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라는 텔레비전에서 《에드워드 7세》(Edward the Seventh)의 데보라 그랜트와 헬렌 라이언, 《릴리》(Lillie)의 앤 파인뱅크, 《모든 국왕의 사람들》(All the King's Men)의 매기 스미스, 《잃어버린 왕자》(The Lost Prince)의 비비 안데르손이 연기했다.[37][38][39][40] 영화에서는 1980년 영화 《코끼리 사나이》(The Elephant Man)에서 다시 헬렌 라이언이, 1997년 영화 《미세스 브라운》(Mrs Brown)에서 사라 스튜어트가, 1999년 영화 《열정》(Passion)에서 줄리아 블레이크가 연기했다.[41][42][43] 1980년 로이스 라이턴의 희곡 《마더디어》(Motherdear)에서는 마가렛 록우드가 마지막 연기로 알렉산드라를 연기했다.[44] 또한 1907년, 북미 최초의 왕립 극장으로 캐나다 토론토에 로열 알렉산드라 극장이 세워졌다. 이 극장은 남편 에드워드 7세 국왕이 특허장을 수여한 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45]
6. 4. 기타
알프레드 길버트(Alfred Gilbert)가 제작한 알렉산드라 여왕 기념비는 1932년 6월 8일 런던 말버러 게이트에서 알렉산드라 장미의 날(Alexandra Rose Day)에 공개되었다.[30] 당시 국왕 음악 감독(Master of the King's Musick)이었던 에드워드 엘가 경이 당대의 영국 계관 시인 존 메이스필드의 시에 곡을 붙인 추모곡, "So many true princesses who have gone"|알렉산드라 여왕 기념 오드eng가 공개식에서 작곡가의 지휘로 연주되었다.[31]
알렉산드라는 영국 대중에게 매우 인기가 많았다.[32] 남편 에드워드나 시어머니 빅토리아와 달리 언론의 비난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녀가 모금 활동을 통해 마련한 기금은 수단 전쟁 중 부상자 수송을 위한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의 강정(river launch)을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고, 부상자들을 후송하기 위한 '웨일스 공주호'라는 이름의 병원선을 장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33] 보어 전쟁 중에는, 나중에 알렉산드라 여왕 육군 간호 군단(Queen Alexandra's Royal Army Nursing Corps)으로 이름이 바뀐 알렉산드라 여왕 궁정 군사 간호 부대(Queen Alexandra's Imperial Military Nursing Service)가 왕실 명령에 따라 창설되었다.
알렉산드라는 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녀의 재정 관리는 충실한 감독관(comptroller)인 빅토리아 십자훈장 수훈자 다이튼 프로빈 경(Sir Dighton Probyn)이 맡았는데, 그는 남편 에드워드 7세를 위해서도 같은 역할을 했다. 손자인 에드워드 8세(후일 윈저 공작)는 "그녀의 관대함은 재정 고문들에게 당혹스러운 원천이었다. 그녀는 돈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으면, 구걸하는 사람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지 않고, 다음 우편으로 수표를 보냈다."고 회고했다. 항상 사치스러운 것은 아니어서 낡은 스타킹은 기워서 다시 사용했고, 낡은 드레스는 가구 커버로 재활용하기도 했지만, 과도한 지출에 대한 지적은 손짓으로 무시하거나 난청을 핑계로 듣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난청 장애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해져 고통을 겪었다.
알렉산드라는 어린 시절 림프절결핵(경부 림프절 결핵) 수술로 인한 작은 목 흉터를 가리기 위해 초커 목걸이와 하이넥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었는데,[34] 이는 약 50년 동안 유행을 선도했다. 일설에는 남편 에드워드 7세가 이 흉터를 본 후 알렉산드라에 대한 애정을 잃었다고도 전해진다. 또한 1867년, 세 번째 아이인 루이즈를 출산한 후 류머티즘열 합병증으로 다리가 굳어 절뚝거리게 되자, 상류층 여성들은 그녀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까지 따라 했다. 이는 "알렉산드라 절뚝거림"으로 알려지게 되었다.[35][36] 그녀는 지팡이 대신 파라솔을 사용하게 되었고, 이 또한 상류 사회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주로 런던의 패션 하우스를 이용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곳은 레드펀이었지만, 파리의 두세와 프로몽에서도 가끔 쇼핑을 했다.
그녀가 좋아했던 꽃은 스위트피로, 의식이나 만찬회에서 스위트피를 장식하여 여러 나라에서 스위트피가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칵테일의 일종인 알렉산더는 에드워드 7세가 알렉산드라에게 바친 "알렉산드라"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지만, 진위는 불명확하다. 마라톤의 공식 거리가 42.195km가 된 것은 1908년 런던 올림픽 당시 알렉산드라가 마라톤 코스의 출발 지점을 윈저 성 정원으로, 결승 지점을 경기장 로열 박스 앞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당초 계획했던 약 42km(26마일) 코스에서 약 352.04m가 추가되어 현재의 거리가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런던 병원에 관심이 많아 자주 방문했으며, 그녀가 만난 환자 중에는 "코끼리 인간"으로 알려진 조셉 메릭도 있다.[62] 또한 동물을 매우 좋아하여 그녀의 거처였던 샌드링엄 하우스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선물로 보내졌고, 수가 너무 많아진 동물들은 동물원에 기증되었다. 특히 애견가로 유명했는데, 야외에서는 세인트 버나드, 뉴펀들랜드, 북극견, 바셋하운드, 차우차우, 닥스훈트 등을, 실내에서는 퍼그, 긴털치와와, 페키니즈 등을 길렀다. 산책 시에는 10마리 이상의 개를 데리고 다녔으며, 개들은 그녀의 명령에 매우 잘 따랐다고 한다. 켄넬 클럽의 후원자이기도 했으며, 그녀의 개들은 여러 번 품평회에 출품되어 수상하기도 했다. 밤에는 야식으로 나온 샌드위치를 몰래 방 밖으로 내놓아 침대에서 개들에게 먹였다는 일화도 있다.
1907년, 캐나다 토론토에는 북미 최초의 왕립 극장인 로열 알렉산드라 극장(Royal Alexandra Theatre)이 세워졌다. 이 극장은 남편 에드워드 7세 국왕이 특허장을 수여한 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45]
알렉산드라는 여러 대중 매체에서 묘사되었다.
7.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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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이름 | 출생 | 사망 | 기타 |
---|---|---|---|---|
장남 ![]() | 클래런스와 에이번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Albert Victor, Duke of Clarence and Avondale | 1864년 1월 8일 | 1892년 1월 14일 | 테크의 메리와 약혼하였으나 결혼 전 사망 |
차남 ![]() | 조지 5세 King George V | 1865년 6월 3일 | 1936년 1월 20일 | 테크의 메리와 결혼 엘리자베스 2세의 할아버지 슬하 5남 1녀 |
장녀 ![]() |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 Louise, Princess Royal | 1867년 2월 20일 | 1931년 1월 4일 | 제1대 파이프 공작 알렉산더 더프와 결혼 슬하 1남 2녀 |
차녀 ![]() | 빅토리아 공주 Princess Victoria | 1868년 7월 6일 | 1935년 12월 3일 | 미혼 |
3녀 ![]() | 웨일스 공녀 모드 Maud of Wales Maud av Noreg | 1869년 11월 26일 | 1938년 11월 20일 | 노르웨이의 호콘 7세와 결혼 노르웨이의 왕비 올라프 5세의 어머니 |
3남 | 알렉산더 존 왕자 Alexander John | 1871년 4월 6일 | 1871년 4월 7일 | 요절 |
참조
[1]
서적
Burke's Royal Families of the World, Volume 1
Burke's Peerage
[2]
서적
Lines of Succession
Little, Brown
[3]
웹사이트
Idun (1890): Nr 15 (121) (Swed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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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iscombe, pp. 257–258 and Duff, pp. 148–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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